- 1배터리 분쟁에서 미국 ITC는 기술의 우열을 본안에서 끝까지 가리기 전에, 증거 보존 문제를 이유로 제재를 내렸습니다. 기술보다 절차가 먼저 결론을 낸 겁니다.
- 2가장 뼈아픈 대목은 보존 의무가 언제 생겼는가입니다. 소장이 접수된 날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도착한 경고 서한이 방아쇠였습니다.
- 3그래서 기업들이 바꾼 건 기술 전략이 아니라 문서 관리였습니다. 평소에는 미덕이던 '정기 삭제'가, 어느 시점부터는 위험이 됩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변리사 유연입니다.
분기마다 메일함을 비우는 날의 상쾌함, 다들 아실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수천 통을 정리하고 나면 뭔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런데 법률가로 일하면서 그 상쾌함이 조금 불편해졌습니다. 어떤 시점부터는 그 '정리'가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거든요. 증거 인멸이라고요.
지난 편에서 영업비밀 관리의 본질이 자물쇠가 아니라 장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백은 평소 남겨둔 기록으로만 증명된다고요. 오늘은 그 문장의 뒷면입니다. 기록을 지우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답을 가장 비싸게 보여준 사건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 본 글은 공개된 해외 절차의 진행 경과를 소송 실무 학습 목적으로 소개하는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아래 내용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공개 결정과 언론 보도에 따른 것이며, 해당 분쟁은 2021년 당사자 합의로 최종 종결되었습니다.
PART 1. 기술을 다투기도 전에 절차에서 갈렸습니다
2019년 4월,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ITC에 영업비밀 침해를 이유로 제소했습니다. 70명이 넘는 전직 인력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술이 넘어갔다는 주장이었죠.
그런데 이 사건은 "누구 기술이 더 앞섰나"를 끝까지 따지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2020년 2월, ITC의 행정판사(Administrative Law Judge)는 증거 훼손을 이유로 한 제재 신청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기록상 조사 쟁점과 관련된 증거가 파기되었고 그 의도가 인정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 결과 본안의 기술적 쟁점을 하나하나 심리하는 대신, 제재로서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정(default judgment)이 내려졌습니다.
2021년 2월 10일, 위원회는 최종 결정에서 관세법 제337조 위반을 인정하고 10년간의 제한적 수입배제명령과 중지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21년 4월, 양사는 18억 달러 규모의 합의로 모든 분쟁을 끝냅니다.
여기서 균형을 잡겠습니다. 위 내용은 ITC라는 행정기관의 판단이고, 사건은 결국 판결이 아니라 합의로 종결됐습니다. 그래서 기술적 쟁점의 우열이 본안 판단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며, 저는 어느 기업의 잘잘못을 도덕적으로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오늘 붙들 것은 딱 하나입니다. 왜 절차가 본안을 이겼는가.
PART 2. ★ 디스커버리 — 남의 나라 소송이 무서운 진짜 이유
먼저 미국 소송의 구조를 알아야 이 사건이 이해됩니다. 우리 소송과 결정적으로 다른 제도가 하나 있거든요. 디스커버리(discovery)입니다.
· 우리 민사소송 — 원칙적으로 각자 자기가 가진 증거를 냅니다. 상대에게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려면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해야 하고, 대상도 특정해야 합니다. 상대 서버를 통째로 들여다볼 수는 없습니다.
· 미국 소송 — 본안 심리에 들어가기 전에,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서로 광범위하게 제출합니다. 이메일, 메신저 대화, 문서 초안, 회의록, 그리고 삭제된 파일의 복원본까지 대상이 됩니다.
비유하자면 우리 소송이 각자 내고 싶은 카드만 보여주는 게임이라면, 미국 소송은 시작 전에 서로 패를 다 까고 들어가는 게임입니다.
한국 기업이 미국 소송에서 고전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 문화가 낯설어서요. "내부 자료를 왜 상대에게 줍니까"라는 감각이 우리에겐 자연스러운데, 그쪽에서는 그 감각 자체가 이미 위반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디스커버리는 사실상 전자문서 디스커버리입니다. 대상이 종이가 아니라 메일 계정과 메신저와 서버니까요. 수십만 건 단위의 전자문서를 검색해 제출하는 작업이라, 특허 변호사보다 포렌식 전문가를 먼저 부르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PART 3. ★ 방아쇠는 소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교훈적인 대목이 여기입니다. 그리고 실무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증거를 보존할 의무는 언제 생길까요. 대부분 "소장을 받으면"이라고 답하십니다. 틀렸습니다.
보도된 경과를 보면, 이 사건에서 보존 의무의 기준이 된 시점은 2019년 4월 9일 법적 조치를 예고하는 서한이 도착한 때였습니다. 정식 제소는 그로부터 20일 뒤인 4월 29일이었고요.
즉 소장이 아니라 경고장이 방아쇠였습니다.
미국 실무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소송이 합리적으로 예견되는 시점부터 관련 자료를 보존할 의무가 생깁니다. 경고 서한을 받았을 때, 내부 제보가 들어왔을 때, 규제기관이 자료를 조회했을 때. 아직 아무도 소송을 걸지 않았어도 그때부터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그 시점에 리티게이션 홀드(litigation hold), 우리말로 하면 증거보전 지시를 내립니다. 관련 부서에 "이 주제와 관련된 자료는 지우지 말라"고 통지하고, 무엇보다 서버의 자동 삭제 정책을 정지시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회사의 정상적인 문서관리 정책이 바로 이 순간부터 위험이 됩니다.대부분의 회사는 일정 기간이 지난 메일과 파일을 자동으로 삭제합니다. 저장 비용도 아끼고 정보 유출 위험도 줄이니 평소에는 대단히 합리적인 정책이죠. 그런데 보존 의무가 생긴 순간부터는 그 정책이 자동으로 증거를 지우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도요.
그리고 이건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지웠습니다"는 오히려 "보존 의무를 알고도 시스템을 멈추지 않았다"로 읽힙니다.
그래서 첫 번째 명제입니다. 증거 인멸은 의도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스템으로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그 둘을 구분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PART 4. ★ 왜 그렇게까지 무겁게 벌하나 — 절차가 본안을 이기는 이유
법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증거를 지운 것이 왜 기술 자체를 다투는 것보다 더 치명적일까요.
생각해 보면 법원은 곤란한 처지에 놓입니다. 없어진 증거의 내용을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럼 선택지는 둘입니다.
· 없는 대로 판단한다 → 그러면 지운 쪽이 이득을 봅니다. 불리한 자료를 없앤 만큼 유리해지니까요.
· 지운 쪽에 불리하게 추정한다 → 지우는 것이 손해가 됩니다.
법은 두 번째를 택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첫 번째를 택하는 순간 "불리한 증거는 지우는 게 이득"이라는 계산이 성립하고, 그러면 증거 제도 자체가 무너지니까요.
그래서 이건 응징이 아니라 유인 설계입니다. 지우는 행위가 절대로 이득이 되지 않도록 값을 매기는 것이죠. 제재의 강도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 자료가 불리한 내용이었다고 추정하는 것에서 시작해, 관련 주장이나 증거를 아예 배제하고, 가장 무거운 경우에는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데까지 갑니다. 이 사건이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도 비슷한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민사소송에서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그 문서에 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형사적으로는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를 처벌하고요.
다만 체감의 크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애초에 상대 자료를 광범위하게 요구하는 문화가 아니라, 보존 의무를 의식할 계기 자체가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 감각으로 "정기적으로 정리했다"가 저쪽 절차에서는 "조직적으로 인멸했다"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명제입니다. 국경을 넘는 분쟁에서 진짜 위험한 것은 법이 다른 게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감각이 다른 것입니다.PART 5. 그래서 무엇을 준비하나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들만 정리하겠습니다.
① 방아쇠 목록을 미리 만들어 두십시오
어떤 일이 생기면 "소송이 예견되는 시점"으로 볼 것인가. 경고 서한 수령, 내부 제보, 핵심 인력의 경쟁사 이동 인지, 규제기관의 자료 요청, 언론의 취재 문의. 이런 항목을 목록으로 정해두지 않으면, 그 순간이 지나가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법무팀이 뒤늦게 알았을 때는 이미 몇 주가 지나 있고요.
② 자동 삭제를 즉시 멈출 수 있는지 확인해 두십시오
이건 법무의 문제가 아니라 전산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사가 평소에 확인해 두지 않았다가, 정작 필요한 순간에 "정지 기능이 없다"거나 "며칠 걸린다"는 답을 듣습니다. 지금 확인해 두시면 됩니다.
③ 통지하고, 통지한 사실을 남기십시오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보존하라고 알렸는지. 이 기록 자체가 나중에 회사의 성실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지난 편에서 결백은 기록으로 증명된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같습니다.
④ 개인 기기와 메신저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요즘 회사의 진짜 대화는 사내 메일이 아니라 메신저에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 부분이 개인 휴대폰에 있고요. 사내 메일 서버만 보존하고 안심하는 것이 가장 흔한 실수입니다.
⑤ 역설적이지만, 평소의 삭제 정책을 정비하십시오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데, 답은 "다 보관하자"가 아닙니다. 무한 보관은 비용도 문제지만, 나중에 불리한 자료가 그만큼 많이 남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일관성입니다. 보존 기간 정책이 명확히 문서화돼 있고 평소에 예외 없이 지켜져 왔다면, "우리는 원래 규칙대로 지웠다"는 설명이 성립합니다. 반대로 정책이 없거나 있어도 지켜지지 않았다면, 특정 시점의 삭제만 유독 눈에 띄게 됩니다. 평소에 규칙 없이 살던 회사가, 문제가 생긴 뒤에 규칙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실무 체크리스트 — 해외 분쟁 가능성이 있는 회사라면 (저장해 두세요)
1. 방아쇠는 소장이 아니다 — 경고 서한, 제보, 규제기관 조회 시점부터 보존 의무를 상정하라. 목록으로 미리 정해 둔다.
2. 자동 삭제 정지 기능을 오늘 확인하라 — 없거나 오래 걸린다면 그 자체가 잠재적 위험이다.
3. 보존 지시와 그 통지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라 — 성실성의 증거가 된다.
4. 개인 기기와 메신저를 범위에 넣어라 — 진짜 대화는 사내 메일 밖에 있다.
5. 무한 보관이 아니라 일관된 규칙을 만들어라 — 규칙 없이 지운 것과 규칙대로 지운 것은 완전히 다르게 평가된다.
마치며 — 지지 않으려면, 이기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이 분쟁이 남긴 교훈은 "우리 기술이 뛰어나야 한다"가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다툴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정은 진실을 직접 보는 곳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보는 곳입니다. 그래서 증거가 사라지면 진실도 함께 사라집니다. 법이 증거를 훼손한 쪽을 그토록 무겁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건 한 사건의 승패를 넘어, 재판이라는 제도가 성립할 수 있느냐의 문제거든요.
앞 편에서 영업비밀 관리를 자물쇠가 아니라 장부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 장부는 평소에 성실히 적어야 하고, 문제가 생길 조짐이 보이는 순간부터는 한 장도 찢으면 안 됩니다. 찢는 순간,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불리해지니까요.
그래서 저는 분쟁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만나면 기술 이야기보다 이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서버의 자동 삭제를 멈출 수 있습니까?"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부터가 일입니다.
기업의 가장 값진 자산이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면, 가장 위험한 자산은 아마 삭제 버튼일 겁니다.
"법정은 진실을 직접 보는 곳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보는 곳입니다. 그래서 증거가 사라지면 진실도 함께 사라지고, 법은 지운 쪽에 불리하게 추정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불리한 증거를 지우는 게 이득이 되니까요. 어떤 시점부터 '정리'는 '인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작성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 본 글은 공개된 해외 절차의 경과를 소송 실무 학습 목적으로 소개하는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인용한 경과와 수치는 ITC의 공개 결정과 언론 보도에 따른 것이고, 해당 분쟁은 2021년 4월 당사자 합의로 최종 종결되어 기술적 쟁점의 우열이 본안 판단으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디스커버리·증거보전 제도는 우리 민사소송 제도와 다르며, 개별 사안은 관할과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함께 보기 : 「우리는 훔치지 않았다는 말로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 경력직 채용과 오염 방지」 · 「코카콜라는 왜 특허를 안 냈을까 — LG·SK 배터리 전쟁」 · 「샤넬 No.5에는 왜 특허가 없을까」)
※ 고지 본 사이트의 게시물은 관련 법령과 실무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자료이며,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법령·판례와 그 해석은 변경될 수 있고 구체적 결론은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행 중인 사안의 결과를 확정적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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