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기업이 분쟁에서 계산하는 건 "이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길 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입니다. 법의 시계가 사업의 시계보다 느리면, 이길 수 있어도 합의합니다.
- 2협상을 만든 건 명령 자체가 아니라 시한이었습니다. 합의는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기간이 끝나기 하루 전에 타결됐습니다.
- 3그리고 합의금의 구조가 성격을 말해줍니다. 현금 1조 원과 로열티 1조 원. 현금은 과거의 청산이고 로열티는 미래의 사용 대가입니다. 소송으로 시작해 거래로 끝난 겁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변리사 유연입니다.
분쟁 상담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있습니다. 상대의 주장이 약하고 우리 쪽 논리가 탄탄할 때,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길 것 같습니다. 다만 이기실 때쯤이면, 지키려던 그 사업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의뢰인 표정이 굳는 순간이죠. 그런데 이게 기업 분쟁의 가장 정직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재판에서 이기는 것과 사업에서 살아남는 것은 다른 문제거든요.
앞서 두 편에서 배터리 분쟁의 사람 문제와 증거 문제를 봤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2021년 4월, 두 회사는 2조 원 규모의 합의로 모든 분쟁을 끝냈습니다. 많은 분이 이 숫자를 배상금으로 읽으셨죠. 저는 다르게 읽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입니다.
※ 본 글은 공개 보도된 분쟁의 경과를 기업 분쟁 전략 학습 목적으로 소개하는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인용한 경과와 수치는 언론 보도와 양사 발표에 따른 것이고, 해당 분쟁은 당사자 합의로 종결되어 기술적 쟁점의 우열이 본안 판단으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PART 1. 숫자를 다시 읽어봅니다
2021년 4월, 양사는 합의를 발표했습니다. 보도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총 2조 원 규모이고, 현금 1조 원과 로열티 1조 원으로 나뉘며, 국내외 모든 쟁송을 취하하고 앞으로 10년간 추가로 제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사가 "합의금 2조 원"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사람들은 이걸 배상금으로 이해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만큼 물어준다는 그림이죠.
그런데 이 숫자를 이해하려면 그 시점에 각자가 무엇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당시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주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미 상당한 투자가 들어갔고, 포드와 폭스바겐 같은 완성차 회사에 납품할 계획이 잡혀 있었죠. 그런데 2021년 2월 ITC의 최종 결정으로 10년간의 수입배제명령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명령에는 미국 내 공급망을 고려한 예외가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어쨌든 미국 사업의 뼈대가 흔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이 협상 테이블에서 실제로 거래된 것은 과거의 잘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시장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관점 전환입니다. 2조 원은 과거에 매긴 값이 아니라 미래의 시장 접근권에 매긴 값이었습니다.PART 2. ★ 분쟁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습니다
여기가 오늘의 뼈대입니다. 기업 분쟁을 볼 때 저는 늘 시계를 두 개 그립니다.
법의 시계 — ITC 결정이 나와도 끝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승인 거부 심사가 남고, 연방항소법원으로 갈 수 있고, 별도의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최종 확정까지 몇 년이 더 걸릴 수 있는 구조였죠.
사업의 시계 — 공장 준공일이 있습니다. 고객사에 약속한 납품 개시일이 있고, 그걸 못 지키면 물어야 하는 위약금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 고객이 대체 공급선을 찾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이 두 시계는 완전히 다른 속도로 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업 분쟁의 핵심 질문이 나옵니다.
"이길 수 있는가"와 "이길 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법률가는 대개 앞의 질문에 답하도록 훈련받습니다. 논리가 되는지, 증거가 있는지, 판례가 어느 쪽인지. 그런데 경영자가 실제로 물어야 하는 건 뒤의 질문입니다. 재판은 마라톤인데 사업은 100미터 달리기인 경우가 많거든요. 마라톤에서 이기는 전략을 짜는 동안 100미터 경주가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이건 진 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긴 쪽에도 시계가 있습니다.
명령을 받아냈다고 해서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집행이 남고, 상대의 불복이 남고, 정치적 구제 시도가 남습니다. 그동안 시장은 계속 움직이죠. 게다가 완성차 회사들은 공급 불안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배터리 공급망이 소송으로 흔들린다고 판단하면, 한국 회사 둘을 놓고 고민하던 고객이 아예 다른 나라 업체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긴 쪽도 손해입니다.
그래서 합의는 진 쪽이 항복하는 절차가 아닙니다. 양쪽의 시계가 모두 급해졌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PART 3. ★ 협상을 만든 건 명령이 아니라 시한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제도에는 ITC의 결정에 대해 대통령이 정책적 이유로 승인을 거부할 수 있는 기간이 있습니다. 최종 결정일로부터 60일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2021년 2월 10일 결정이 나왔으니, 그 시한이 현지 시간 4월 11일 자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합의는 그 시한이 끝나기 하루 전에 타결됐습니다.
이 타이밍이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그 60일 동안 양쪽은 정확히 반대 방향의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거든요.
· SK 입장 — 거부권이 행사되면 명령이 무력화됩니다. 희망이 있었습니다. 다만 안 되면 미국 사업이 심각해집니다.
· LG 입장 — 거부권이 행사되면 어렵게 얻은 결정이 통째로 날아갑니다. 이긴 것이 없던 일이 됩니다.
즉 양쪽 모두에게 "잘하면 다 얻고, 잘못되면 다 잃는" 구간이었습니다. 협상학에서 합의가 가장 잘 이뤄지는 조건이 바로 이겁니다. 양쪽이 동시에 불확실성을 견디기 힘들어지는 순간.
여기에 미국과 한국 정부가 조기 타결을 요청하며 중재에 나선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일자리와 전기차 공급망이라는 정책적 이해가 걸려 있었으니까요. 정부가 시계를 더 빠르게 돌린 셈입니다.
두 번째 명제입니다. 협상은 여유가 있을 때가 아니라 시계가 다 되었을 때 타결됩니다.그래서 분쟁을 다루는 사람은 법리만 보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결론이 나야 하는지, 상대에게는 언제가 급한지, 그리고 그 시한을 만들 수 있는지 없앨 수 있는지를 함께 봅니다. 앞선 편에서 "칼은 찌르려는 게 아니라 앉히려고 뽑는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시한이 상대를 앉힙니다.
PART 4. ★ 합의금의 구조가 말해주는 것 — 소송으로 시작해 거래로 끝났습니다
이제 숫자의 내부를 보겠습니다. 저는 합의 조건을 볼 때 총액보다 구성을 먼저 봅니다. 구성이 그 합의의 성격을 드러내거든요.
현금 1조 원과 로열티 1조 원. 이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 현금 — 과거에 대한 청산입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정리하는 값이죠.
· 로열티 — 미래에 대한 사용 대가입니다. 앞으로 그 기술을 쓰면서 내는 돈입니다.
그리고 로열티가 붙는 순간, 그 문서의 성격이 바뀝니다. 배상이 아니라 라이선스가 되거든요.배상은 "네가 잘못했으니 물어내라"입니다. 로열티는 "네가 쓰는 걸 인정할 테니 값을 내라"입니다. 전자는 관계의 종료이고 후자는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이 합의문은 분쟁 종결 서류인 동시에 기술 라이선스 계약이었던 셈입니다.
여기에 10년 부제소 조항이 붙습니다. 앞으로 10년간 서로 걸지 않기로 한 것. 이건 무엇을 산 걸까요. 평화입니다. 정확히는 예측 가능성이죠. 그 10년 동안 두 회사는 소송 걱정 없이 각자 투자하고 수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2조 원의 내역을 다시 적으면 이렇습니다. 과거의 청산, 미래의 사용권, 그리고 10년의 평화. 이 셋을 한꺼번에 산 값입니다.
이 대목이 IP 금융 시리즈와 이어집니다. 거기서 특허를 "배당이 나오는 자산"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배당이 라이선싱이라고 했죠. 이 사건은 그 배당이 협상이 아니라 소송을 거쳐 실현된 경우입니다. 값을 매기지 못하던 자산에 법적 절차가 값을 매겨준 겁니다.
그래서 세 번째 명제입니다. IP 분쟁의 종착점은 대부분 판결이 아니라 계약입니다. 소송은 값을 매기기 위한 절차에 가깝습니다.실제로 대형 IP 분쟁의 상당수가 합의로 끝납니다. 판결까지 가는 게 오히려 예외예요. 그래서 이런 사건을 맡으면 처음부터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합니다. 이기기 위한 논리와, 합의할 때 우리가 받을 조건. 후자를 준비하지 않고 싸우면, 정작 테이블이 열렸을 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PART 5. 그래서 분쟁을 앞둔 회사는 무엇을 계산해야 하나
실무로 옮기겠습니다.
① 승소 확률과 함께 '버틸 기간'을 물으십시오
변호사에게 "이길 수 있습니까"만 묻지 마시고 "결론까지 얼마나 걸립니까"를 함께 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사업이 버틸 수 있는지 계산하십시오. 이 계산 없이 시작한 소송은 대개 중간에 방향을 잃습니다.
② 우리 시계에 못 박힌 날짜를 먼저 적으십시오
공장 준공일, 납품 개시일, 계약 만료일, 자금 조달 일정. 이 날짜들이 협상의 실제 마감입니다. 법원이 정해주는 기일보다 이쪽이 훨씬 강하게 작용합니다.
③ 상대의 시계도 그리십시오
상대가 급한 날짜가 곧 내 협상력입니다. 상대의 공급 계약, 상장 일정, 규제 승인 시한. 이걸 모르고 협상하면 언제 밀어붙이고 언제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④ 종결 방식을 미리 상상하십시오
이 사건은 판결로 끝날 사건인가, 계약으로 끝날 사건인가. 후자라면 처음부터 최종 계약 조건을 그려놓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소송에서 확보한 것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조건으로 환산됩니다.
⑤ 진짜 심판은 고객입니다
기업 간 분쟁, 특히 공급 관계가 걸린 분쟁의 최종 심판은 법원이 아니라 고객입니다. 고객이 "이 회사들 시끄러우니 다른 데를 알아보자"고 판단하는 순간, 이겨도 진 겁니다. 그래서 분쟁 중에도 고객 커뮤니케이션이 법률 대응만큼 중요합니다.
실무 체크리스트 — 큰 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저장해 두세요)
1. "이길 수 있는가"와 "이길 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를 따로 물어라 — 답이 다르면 전략이 달라진다.
2. 사업의 시계를 먼저 적어라 — 준공일, 납품일, 계약 만료일이 진짜 마감이다.
3. 상대의 급한 날짜를 파악하라 — 그것이 곧 협상력의 크기다.
4. 합의 조건을 처음부터 설계하라 — 총액보다 구성이 중요하다. 현금은 과거, 로열티는 미래, 부제소는 평화다.
5. 고객의 인내심을 자원으로 계산하라 — 공급 관계 분쟁의 최종 심판은 법원이 아니라 고객이다.
마치며 — 끝내는 방식이 곧 전략입니다
3부작을 정리하겠습니다. 첫 편에서 이 분쟁이 특허가 아니라 사람에서 시작됐다고 했고, 둘째 편에서 승부가 기술이 아니라 증거에서 갈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끝이 판결이 아니라 계약이었다는 것을 봤습니다.
시작도 끝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던 셈입니다. 기술 대결이라 불렸지만 실제로 결정적이었던 건 인사 관리, 문서 관리, 그리고 시간 계산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한국 기업들에게 비싼 수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배운 값을 제대로 쓰려면 결론을 정확히 가져가야 합니다. "소송은 무섭다"가 아니라, 분쟁은 법률 문제이기 이전에 시간과 자원의 문제라는 것.
그래서 저는 분쟁 상담을 시작할 때 승소 가능성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먼저 여쭙습니다. "이 다툼이 3년 갈 수도 있는데, 그동안 회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날짜가 언제입니까?" 그 답이 나오면 전략의 절반이 정해집니다. 어떤 사건은 끝까지 가야 하고, 어떤 사건은 좋은 조건으로 빨리 끝내는 게 이기는 겁니다.
이기는 것과 끝내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잘 끝내는 것도 실력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까'와 '이길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까'는 다른 질문입니다. 법의 시계와 사업의 시계가 다르게 가니까요. 그래서 2조 원은 과거에 매긴 값이 아니라 미래의 시장 접근권에 매긴 값이었고, 로열티가 붙은 순간 그 분쟁은 배상이 아니라 거래가 됐습니다."작성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 본 글은 공개 보도된 분쟁의 경과를 기업 분쟁 전략 학습 목적으로 소개하는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합의 금액과 조건, 절차 일정은 양사 발표와 언론 보도에 따른 것으로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해당 분쟁은 당사자 합의로 종결되어 기술적 쟁점의 우열이 본안 판단으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절차는 우리 제도와 다르고, 개별 사안은 사실관계·관할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배터리 분쟁 3부작 : ① 「코카콜라는 왜 특허를 안 냈을까 — 영업비밀의 세계」 · ② 「승부를 가른 건 배터리가 아니라 이메일이었습니다 — 증거 보전」 · ③ 「2조 원은 시간을 산 값이었습니다」)
(함께 보기 : 「특허도 자산인 시대 — IP 금융 시리즈」 · 「M&A 할 때 왜 변호사가 필요한가」)
※ 고지 본 사이트의 게시물은 관련 법령과 실무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자료이며,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법령·판례와 그 해석은 변경될 수 있고 구체적 결론은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행 중인 사안의 결과를 확정적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변호사 광고 — 게시자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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